전 세계를 무대삼아 한국 사진의 위상을 드높인 사진작가 구본창,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날 그가 겪은 시련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바탕이 되었다. 작품 활동에 후학을 양성하는 일까지 온 마음을 쏟고 있는 그를 만나 보았다.
1980년대 사진이 새로운 예술 장르로 가치를 발하기 전, 청년 구본창은 1970년 26세의 나이로 흑백사진 일색이던 한국을 벗어나 총천연색 컬러 인쇄물이 활보하는 독일 함부르크 거리에서 벅찬 심장 박동소리를 느꼈다. 첫발을 내디딘 타향살이의 외로움 보다 눈 안 가득 들어오는 함부르크의 아름다운 풍경과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인쇄물, 포스터, 쇼윈도에 진열된 다양하고 많은 제품들에 매료된 그는 일생일대를 전환할 앞날의 희망을 품게 된다. 독일에서 그는 갇혀 있던 자신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다.
1992년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미술 아카데미(Pentiment)초청 교수, 1999 런던 세인트 마틴 스쿨 초청교수, 2004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미술 아카데미 초청교수, 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2000년부터 현재 박건희 문화재단 이사장 역임, 2010년 현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로서, 국제 전시 기획자로 한국 사진의 국제화를 앞당긴 그의 프로필 일부를 위에 언급했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수많은 사진전과 국제 전시 기획력으로 얻은 그의 이력은 넘쳐난다. 하지만 그의 이력 속에 녹아 겹겹이 쌓인 그만의 시간계를 들여다보면, 농부가 끈질긴 애정으로 과실을 맺듯 그 역시 당도 높은 희로애락의 과즙을 생애 속에서 얻어낸 집념이 담겨 있었다.
꺾인 감수성에 새 날개 짓을 시작한 독일 유학시절 어릴 적부터 미술에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그는 일찍이 일류를 고집하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1975년 연세대 상경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쟁이 치열했던 대우실업에 취직했다. 틀에 박힌 출퇴근과 잦은 야근, 상사에 이끌려 독한 술을 마셔야만 했던 말단사원의 고달픔 때문에 그는 6개월간의 극심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물음 앞에 그동안 억눌렸던 예술적 감성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고 결국 먼 타향에서 그 답을 얻었다. 유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로 인해 학비가 들지 않는 곳, 제2외국어로 이미 배워 낯설지 않는 독일 행을 계획했고, 다행히 어느 중소기업의 주재원으로 뽑혀 낮으로는 회사 일을 하고, 저녁으로는 괴테 어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려웠을 법도 한 외국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자극과 신선함을 가져다주었고 마른 장작더미가 활활 타듯 하고 싶었던 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쉰 중반을 훌쩍 넘긴 작가 구본창이 유학시절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다시금 그때의 감격스러운 심경을 토해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고 현실에 만족하고 살려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예술적 감수성이 있어도 한국에서는 잘한다. 멋있다는 소리보다 ‘사내 녀석이 쓸데없는 것들을 모으고, 왜 그런 것들을 좋아하느냐?’하고 핀잔 듣기 일쑤였기에 감성을 억누르며 나 자신과 싸우느라 꽤나 힘들었어요.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의 천재예술가 미켈란젤로가 바위 속에 천사가 있다면 조각을 해서 끄집어냈다던 유명한 일화처럼, 작가 구본창은 응시하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을 찾아내는 애정이 남다르다. 결국 누구든지 그가 품은 마음의 세계 안에 들어오면 어떤 아름다움이든 사진을 통해 찾아내고야 만다. 그의 사진을 만난 사람들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닌 숨쉬는 대상을 느끼게 된다. 그런 나를 재발견할 수 있었고 6년 동안 열심히 공부만 해서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말 행복했죠. 마치 물고기가 물 만난 듯, 어깨에 날개를 단 기분이었어요.”
아시아에서 온 청년의 별명, ‘당나귀 구(Koo, 具) 그는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에 입학하여 각종 그림, 사진, 판화 및 디자인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배웠다. 자연스럽게 사진을 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졌고 여섯 시면 마치던 암실을 열시까지 사용하였다. 아시아에서 온 그를 눈여겨보며 격려했던 스승의 사랑이 가난한 유학생의 고단함을 녹이며 큰 힘이 되었다. 그 또한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스승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결석 한번하지 않고 매주 새로운 사진을 들고 나타났다. 그 시절 구본창이 얻은 별명은 ‘당나귀 구(Koo, 具)’.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청바지 하나에 가방을 울러 메고 사진 촬영에 필요한 배경부터 오브제까지 필요한 것들을 손에 바리바리 싸가지고 두 발로 걸어 다닌 그 모습이 흡사 짐을 가득 싣고 가는 당나귀와 같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겪고 있는 허리통은 지난날부터 지금껏 작품 사진을 얻기 위해 발품을 팔며 길들여진 오랜 훈장처럼 그의 몸에 남아 있다.
시련의 늪에서 재능을 꽃피우고 싶었다 유럽에서 인정받는 젊은 사진작가가 되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누구도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도, 촬영을 요청하는 곳도 없어 아버지나 형에게 푼돈을 꾸러 다녔다. 그럴 때면 “왜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이삼만 원을 달라고 하느냐?” 한소리 듣기 십상이었고, 그때의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당시 고가의 필름값과 인화비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뚜렷한 호구지책도 없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래도 산목숨 죽으라는 법이 없다고 그는 정신력 하나로 버텨냈다. 귀국 전 평소 좋아하던 어느 작가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했던 인연이 계속되어 귀국 후에도 그 작가는 세계적인 프로젝트에 구본창을 한국 대표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구본창은 100명의 사진작가를 만났고 어느 유명한 작가는 그의 작품을 보며 “네가 뉴욕 오면 우리는 다 굶어죽겠다.”며 찬사를 보냈다. 여전히 그의 주머니는 비었지만 그들의 평이 청년 구본창을 마음의 부자로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내 실력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되찾았지요. 그들과의 만남은 반드시 재능을 꽃피워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힘이 되었지요.” 하지만 단비 하나 내리지 않아 쩍쩍 갈라진 사막에서 생활하듯 5년 동안 돈과 체력이 아닌 ‘악’으로 버텨냈다.
A. 로댕의 조각품들을 연상케 하는 그의 작품 <In the Beginning:태초에>은 귀국 후 고통스런 시기의 고뇌를 그대로 반영하듯 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억압받는 인체를 표한한 것들이다. 평소 천을 좋아하던 그가 인하지 대신 한국 보자기를 조각조각 이어 붙여본 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파종한 벼가 몇날 며칠 불어대는 비바람에 일어나지 못하면 결국 쓰러진 채 썩어버리듯 재능이 있어도 순간순간 닥치는 시련을 넘지 못하면 무너지기 다반사인 게 우리네 인생이다. 만약 사진이란 도구가 없었다면 최진실처럼 생을 마감했을 거란 그의 말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를 묶고 있는 단단한 운명의 밧줄이 얼마나 그의 숨통을 조였을지 짐작이 됐다. 어려운 시기에 사진을 그만두기보다 사진을 찍고 인화하며 그가 느꼈던 행복함은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만든 삶의 등불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평탄치 못한 사진의 세계로 기꺼이 투혼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상을 읽어내는 남다른 관찰력으로 세계적인 작가반열에 “무엇이든지 길을 지나치다 순간을 포착해서 잡아내기만 하면 사진은 내 것이 되었어요. 결과물도 빨리 나오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는 거예요. 사냥꾼처럼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미지들을 낚아채니까 행복했어요.” 부끄럼 많고 소심했던 그가 어떻게 사진에 대해 남다른 안목을 가질 수 있었는가.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자연을 관찰하고 대화한 20년간의 관찰력으로 인해 결국 남들이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포착해 내는 심미안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사진을 ‘아트’로 알아주기 시작한 시대적 흐름과도 맞아떨어졌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품 <백자>는 사람의 품성이 각기 다르게 표출되듯 백자의 저마다 가진 다른 맛을 끌어내어 사진 속에 표현해 낸 것이다. 몇몇 작품 속 백자는 무엇이 담겨본 적 없이 평생 비워져있는 듯 단아한 한편 외롭게 보였다. 그 이유에 대해 작가 구본창이 맞장구를 쳤다. “대상물을 보고 읽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한 것이 결국 백자의 새로운 면도 찾아낸 것이죠. 백자는 다 사용되는 물건인데 사용되지 않고 비워져 있고, 채워야 되는데 채우지 못한 상태로 남겨진 거죠. 단아함이란 다른 것과 단절된 것에서 오히려 뿜어내고 있는 내적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에너지를 찾는 것이 재미있지요. 핑크빛 백자의 의미는 조선시대 규방여인처럼 깊은 곳에 숨어있는 부드러움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 외에는 우리나라에 있는 백자 아닌 불란서나 일본의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져 100년간 진열장 속에 외롭게 있는 것들도 한꺼번에 다 끌어 모아서 재해석해서 작업한 것입니다.” 화려한 것과 번쩍이는 조명에 익숙한 사람은 그의 백자 작품에서 울려나오는 고요함을 느껴보라. 작가의 ‘눈’을 빌려 차분하게 작품을 살펴보면 백자를 둘러싼 여러 가지 역사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단순해 보이지만 내면의 깊은 곳에서 찾고 길어낸 이미지들은 세상에서 유일한 피사체가 되었다.
수많은 레이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90%이상 작동하다 그는 영화 포스터 사진작업이나 패션 사진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돈을 벌고 모으기보다 끊임없이 전시회를 기획하거나 작품 활동에 재투자해왔다. 무엇을 하든,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는 작품 하나하나에 혼을 불어넣어 찍었으므로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사진이라도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필름이 대부분이었다. 1990년대까지도 작품을 사고팔고 하는 시기가 아니어서 1990년 중반이 지나서야 작품 한두 개가 팔렸다. 2000년대를 넘어서서는 작품으로만 살아가는 전업 작가가 되었고, 지금은 하루에 할 일이 수십 가지로 넘쳐나 머리끝까지 스케줄로 짬을 내기 어려울 정도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분당 ‘구 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때 인터뷰 중에도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 양해를 구하고 번개처럼 처리했다. 그는 전시 일정이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해 소진된 에너지를 보충시킨 뒤 또 다시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음 일에 뛰어든다. 복잡한 업무도 한번은 입력시켜 놓아서 무의식중에 뇌가 짬짬이 컴퓨터처럼 다음 프로세스를 작동시킨다고 믿었다. 모든 일에 대해 책임감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살다 보니 그의 하루는 마치 40시간이나 되는 듯 숨가쁘다.
‘선’을 지키며 사는 삶 2010년 봄부터 그는 경일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게 즐겁다”는 구본창은 젊은 날 자신처럼 수줍지만 열정을 가진 학생들을 눈여겨보며 격려해 준다. 그는 대체로 학생들의 숨어 있는 능력을 찾아주려고 애를 쓰는 반면,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을 혹독하게 가르치기도 한다.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오듯 가르침에도 ‘선’을 긋고 분명하다. 밤샘이 잦은 사진 작업 속에서, 생활을 절제하지 못하면 도태하는 현실 속에서, ‘선’을 지키며 그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내일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