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수요칼럼] 국민을 위로하는 정치 담론을
- 작성자
- 이언경
- 작성일
- 2008/04/14
- 조회수
- 835
[영남일보] 2008/04/09
총선후폭풍 국민에 악영향
담론은 신선한 공기 같아야
민주주의 뿌리 정착에 도움
희망키우는 정치 담론 기대
오늘은 18대 총선일이다. 지역구 245명과 비례대표 54명, 모두 299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다. 어제 밤 12시를 기해서 선거운동은 끝났다. 이제 주사위는 유권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저녁 6시에 투표가 끝나면 그 결과가 속속 발표될 것이다. 정당별 득표에 따른 비례대표도 확정된다. 얼마 후면 이번 총선에 관한 각계각층의 무성한 해석이 난무하고, 국민의 정서적 반응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선거의 시끌벅적했던 말은 숙지겠지만 후폭풍의 언어는 그리 상큼하지 못하리라.
정치도 어떤 면에서 말의 예술이다. 법과 규율이 말로 제정되고, 미래의 비전도 말에 의해 제시된다. 정치에 나서는 사람이나 정치가를 선택하는 사람 모두 말을 피해가지 못한다. 발신에서 수신에 이르기까지 말의 소통 구조가 복잡하여 말을 빌리는 정치 행위가 단성적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말이 믿음을 주느냐이다. 자고로 성현은 언행일치를 가르쳤다.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고민도 말과 몸의 실천이다. "군자는 그 사람의 말만 듣고 천거하지 않고, 사람 때문에 그의 말까지 버리지 않는다"라고 한 공자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현명한 유권자는 오늘 투표에서 소속 정당이나 후보자의 언변만을 보고 일꾼으로 뽑지 않을 것이다. 더욱 현명한 사람은 국민의 대표가 되지 못했다고 하여 유세 기간 동안 우리의 가슴을 진지하게 울렸던 그들의 말을 함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국민 삶의 현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작년 대선에서 오늘 총선에 이르는 그 긴 기간 동안 우리 정치는 국민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국민과 국가를 외치면서 사심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정치적 담론은 어려운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국민에게 신선한 공기와 같이 작용해야 한다. 희망과 믿음을 주는 언어일 때 그렇다. 그런데대선과 총선을 치르면서 우리의 정치는 이러한 언어를 생산하지 못했다. 사리사욕으로 물든 공격적이고 품위 없는 담론을 배설물처럼 쏟아놓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이 등 돌리는 이유다. 정치적 무관심이 정치적 참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순수한 본질을 외면한 채 얄팍한 계산만을 일삼는 정치를 꾸짖는 무언의 항의다. 향후 우리 정치는 경쟁과 분리의 논리에 갇혀 따뜻한 가슴을 읽어내지 못한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 담론은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부드러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더러 70년대 혹은 80년대를 회고하면서 현재를 정치 발전으로 평가한다. 민주주의가 정상 궤도에 오르고 국민들의 정치적 평균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말한다. 부인하지 않는다. 이념의 전면화가 민주주의 정치를 질식시키는 시대는 지나갔다. 기본적인 자유의 목마름은 분명 해갈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첫째, 민주주의의 작은 뿌리가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는지 의심해 볼 일이다.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둥이 눈부셔 부분을 놓치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큰 것에만 신경 쓰고 개인의 생활 가까이 있는 일은 작다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폐기해야 할 이념은 경직된 이데올로기이지 건강한 가치관은 아니다. 이념의 대안으로 채택한 실용이 가치관의 무정부주의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민주주의의 작은 뿌리를 잘 가꾸고 삶의 가치 기준을 정립하는 데 밑거름이 될 참신한 정치 담론 생산을 기대해 본다.
곧 정치판이 새로 짜일 것이다. 달라진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될 수 있다. 정치는 한편으로 꿈을 꾸는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현실 논리에 기댄다. 우리의 정치 담론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키우는 것이어야 한다.
김성동 경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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