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영남일보] 윤정헌의 시네마 라운지
- 작성자
- 장규하
- 작성일
- 2007/06/22
- 조회수
- 591
2007/06/22
시대와 계급을 거스른 비련 - 황진이
일찍이 '임꺽정'으로 우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이룩한 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이 저작해 화제를 모은 북한 소설 '황진이'가 남한 제작진에 의해 영화화, 개봉됐다. 2004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원작소설은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황진이에 훨씬 풍부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평단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황진이에 대한 기성 스토리가 화담 서경덕이나 벽계수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데 비해, 이 작품엔 황진사 댁 하인 출신의 가공인물 '놈이'가 등장함으로써 픽션으로 변주된 역사의 심해를 더욱 깊고 푸르게 채색한다.
원래 여말선초(麗末鮮初), 변방군사 위문과 외국사신 접대를 위한 공공적 용도에 의해 개설되었던 기생제도는 훗날 퇴폐적이고 배금(拜金)적인 향락사업으로 변질되기 전까진 국가기관인 장악원(掌樂院)에 의해 통제되던 엄격한 국가적 메커니즘이었다. 황진이가 스스로 기적에 오르는 것을 양반(비록 서녀였지만)에서 기생으로의 이례적 신분하강이란 호기심의 측면에만 주목해 왔던 기성 시각과 달리, 영화는 시대와 계급에 재능으로 저항한 제도적 예인(藝人) 황진이의 비극적 사랑과 회한을 다루고 있다.
윤승지댁과 혼사가 오가던 중, 자신을 짝사랑해 오던 하인 놈이(유지태)의 발설로 출생의 비밀이 탄로나면서 파혼 당한 황진이(송혜교)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양반 사대부에 대한 복수심으로 놈이에게 몸을 바치고 송도의 객주가인 청교방의 기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던 놈이는 화적으로 전신하고, 뛰어난 미색과 총명으로 양반 사대부의 위선을 희롱하던 황진이는 놈이에 대한 사랑에 눈뜬다.
얼마 전에 방영된 하지원 주연의 동명 드라마를 의식한 듯, 영화는 시대를 재현한 배경 세트와 의상에 상당한 내공을 쏟고 있다. 수려한 문양이 수놓인 검은빛의 한복과 한껏 부풀린 가채와 무너질 듯 쌓아올린 가구들, 그리고 징검다리 걸린 연못을 지나 닿아 있는 황진이의 안방 등 실로 화려한 미장센은 당대 지배층의 허세와 위선을 빼어난 미색과 남다른 재능으로 제압했던 그녀의 도도한 카리스마를 담아내기에 충분하다. 시대가 거부한 하인과 비극적 로맨스를 실천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하고자 했던 여인의 강단이 절절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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