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경북일보-제왕을 교육하는 방법<이해영교수>
- 작성자
- 강열석
- 작성일
- 2005/11/25
- 조회수
- 966
제왕을 교육하는 방법
이 해 영 <경일대 행정학과 교수> 2005/11/10
한반도의 삼국시대에 통일전쟁을 주도한 신라의 김춘추(태종무열왕이 된다)와 김유신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통일 이후에도 신라천년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왕들(물론 소수이지만)의 활약과 치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은 명실공히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뒤이어 그의 아들인 신문왕과 손자들인 효소왕과 성덕왕 등은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국가단위로 통치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외교적 능력과 업적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신라는 찬란한 동방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통일신라의 성대가 계속되면서 아마도 정확하게 표현된 것을 찾을 수는 없지만, 신라의 왕들이 선조의 후광에 의존하면서 때로는 나태하고, 때로는 오만하며, 때로는 광폭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을 지나면서 신라의 역대 왕들은 통일왕국의 통치력을 크게 상실하면서 신라의 종말을 앞당기게 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보더라도 통일신라의 역대 왕들에서 경덕왕 이후 그의 아들인 혜공왕이 반란군에게 피살되면서 그 이후에 신라의 왕들은 왕위쟁탈전이라는 지루한 정쟁을 치르다가, 결국 경애왕은 지역세력의 주도자인 견훤에게 쫓겨 포석정 술자리에서 자살하고 만다.
때문에 유구한 1000년의 역사를 삼베옷자락에 감춘 마의태자(경순왕)는 고려의 태조에게 정식으로 나라를 넘겨야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당시의 대국이고 부국인 신라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원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왕들의 무지와 오만과 편견에 의한 지도력과 국제관계에서의 외교감각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것을 가장 잘 알고 경계하면서 어떻게 하면 왕들을 교육하고 훈육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가슴으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구상한 당대의 재상이 있었으니 그가 김대성이다. 사실 통일신라가 그래도 비교적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략과 지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성은 경덕왕 시대의 재상으로 그 당시에 신라의 왕들이 직면하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왕권국가의 건설과정에서 다양한 부족이나 지방토족 세력 또는 옛 고구려나 백제의 잔존세력들을 신라라는 국가단위로 통합하는 어려움과 왕권내부의 권력게임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국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통일과정에서 당나라의 힘을 빌리면서 신라왕들은 당나라의 사후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국제관계에서 독자적 외교정책이나 국방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이와 같은 정치상황에서 김대성은 신라왕들의 뛰어난 정치적 리더십만이 신라의 살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왕들을 교육하고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영감과 자질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오늘날 세계적 문화유산인 석굴암을 축조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에 불국사는 일반 신라인의 불교숭배와 참배의 장으로 활용되었지만 석굴암은 구조와 위치와 조건 등에서 일반대중의 종교적 장소가 아니라 왕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장소였다.
그래서 국가통치의 일상사와 당나라와의 지루한 외교전쟁에 지친 왕, 때로는 왕권정치의 소모적 정쟁과, 때로는 통일신라의 대왕이라는 오만과 경박한 언행에 허우적거리는 왕을 인도하여 국가를 통치하고 신라를 계승하게 할 자질과 능력을 이제 석굴암을 정기적으로 참배케 하면서 체득하도록 한 것이 김대성의 지혜와 노력이었다.
왜냐하면 변방의 신라가, 그것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수도 경주에서 유일한 살길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 만백성과 동체가 되면서 그들을 자비의 손길로 보살피고 은혜의 눈길로 감쌀 수 있는 왕의 덕성과 인품만이 신라의 살길이라는 것을 김대성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아무도 없는 석굴암에서 우주 만 법계의 자비의 화신으로 나타난 부처상을 마주하면서 이제부터는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면 국가를 제대로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을 겸허하게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만 가지 형상이 하나이고 그 하나는 또한 일만 가지 형상으로 재현되는 화엄사상을 구현한 석굴암 속에서 왕은 부처에게 국가를 통치할 영감과 힘을 줄 것을 기도하면서 동해에 떠오르는 아침햇살처럼 청량하고 질직(質直)한 방법을 간절히 강구했을 것이다. 이것이 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왕을 교육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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