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대구신문-한글사랑이 국경일 제정보다 먼저<신재기교수>
- 작성자
- 강열석
- 작성일
- 2005/11/01
- 조회수
- 911
<오피니언> 대구포럼-한글사랑이 국경일 제정보다 먼저
신재기 문학평론가·경일대 교수
지난 9일은 559돌 ‘한글날’이다. 1926년에 한글날이 선포된 이후 500돌인 1946년부터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기념해 왔다. 그러다가 80년 대 초반에 이르러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왔던 기념행사가 격하되어 문화공보부가 주관하게 되어 오늘까지 왔다. 그것도 1990년부터는 범정공휴일 축소 정책에 의해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고 단순한 기념일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금년에 와서 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국내외적으로 알리고 그 위상을 높이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소중하고 뛰어난 우리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아끼고 길이 보존해야 한다는 각성이기에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한편으로는 현재 나라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심각한 침체 속에 빠져 있는데, 이를 타개하고 장기적인 경제 성장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절제하는 정신과 국민 모두의 피와 땀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해야 한다거나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의 형식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문제의 심각성은 다른 데 있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한다고 해서 한글의 위상이 높아지고, 지금과 같이 단순한 기념일로 남아있다고 해서 한글의 우수성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국민 모두가 모국어인 한글을 현실적인 언어생활에서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느냐의 일일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 혹은 국제화라는 신종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의식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세계 모든 국가에 대한 정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 혹은 ‘민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전통적인 고유성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급속하게 오염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어 사용의 무분별한 범람과 영어 학습을 위한 도가 넘치는 투자와 같이 광란에 가까운 왜곡된 분위기는 결국 영어공용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급부상은 국어를 오용하고 천시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고, 그것의 심각성은 돌연변이 바이러스 이상으로 위험천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어가 국민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직시해 보면 그 현실의 암담함에 놀랄 것이다.
사회 문화의 흐름에 따라 언중의 언어 사용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세계화 시대에 외국어, 특히 영어의 필요성은 강조될 수밖에 없고, 그 영향으로 국어에 영어의 유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의 대두는 그것에 맞는 개념을 필요로 하고, 개념을 드러내는 새로운 어휘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그런데 새로 생성되는 어휘들이 거의 우리말 조어법과는 무관하게 특히 영어 어휘를 날것으로 유행어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콘셉, 웰빙, 인프라, 마인드, 올인 스팸메일, 럭셔리, 쿨 등 우리 언중이 즐겨 사용하는 영어 어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각종 상호나 상품이름, 심지의 아파트 이름까지 거의 영어다.
시대 변화함에 따라 어휘는 사멸하기도 하고 생성되기도 한다. 언중들이 그것을 언어 일상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면 그것이 하나의 규칙이 되는 것이다. 언어정책은 특정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언중들의 자연스런 언어 사용에 맡기는 것이 최상이다. 하지만 자국어의 중요함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필요하다.
누구보다도 이런 인식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는 지식인들에게 절실하다. 이들의 모국에 대한 사랑 없이는 국어의 혼탁함을 순화하기 어렵다. 사실 우리 언어를 혼탁 속으로 몰아가는 주범은 바로 이 사회의 지식인들이며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영어를 자랑삼아 섞어 쓰는 지식인들을 보노라면 그 천박한 의식 수준에 구역질이 날 정도다. 그 중심에 대학교수들이 있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국어순화나 정화, 고유한 우리말 살려 쓰기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처진 고루한 보수주의자로 매도되는 시대다. 이런 생각은 바꿔져야 한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국어의 소중함과 그것에 대해 애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 타당성을 입증하는 다양한 논리의 계발이 시급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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