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매일-'서가에서' 신재기교수
- 작성자
- 이미경
- 작성일
- 2004/08/16
- 조회수
- 1824
매일신문 2004 08 13
<서가에서>-수릉(壽陵)의 젊은이
어떤 이론을 수립하고 논증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진리를 바로 세우는 학문의 방법이란 어쩌면 많은 사례와 증거를 체계화하여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쓰거나 심지어는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쓸 때도 적잖은 자료들을 모으고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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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제나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고, 여기저기에서 찾아낸 참고자료들이 널브러져 있다. 너무나 복잡하게 섞여 있어 필요한 것을 찾는 데 적잖은 시간을 허비할 때도 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은 살리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참고하여 짜깁기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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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연나라 수릉 지방에 사는 한 젊은이가 당시에 가장 번성했던 조나라 한단(邯鄲) 지방의 멋지고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고자 그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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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젊은이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고 기어서 돌아왔다고 한다. 남의 것이 뛰어나고 좋다고 해서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추종하려 한다면, 결국 실패하고 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성까지 잃어버리고 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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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씌어진 책이나 쏟아져 나오는 서적들은 나름대로 각종의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들 중 아주 정확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것도 있지만,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허접스러운 것도 많다. 그러니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보의 양보다 질을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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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이름에 현혹되어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무작정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 우상화의 장막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남의 의견을 참고하여 따를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 좋은 글을 쓰고 창의적인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남의 의견을 충분히 참고해야 한다. 또한 많은 독서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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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독창적인 자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책을 읽지 말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이는 그만큼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릉의 젊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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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기(경일대 미디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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